냉장고에 맥주가 있으니까 맥주를 마시는거다. 난 죄가 없다.

StockPile Effect(비축 효과)의 아주 바람직한 예시 인간

Jun Noh

그냥 매일이 소재 고갈의 늪이다 아주…

어제도 글을 쓰지 않았으니.. 오늘은 써야겠는데, 뭘? 요즘은 런칭이다 홍보다 뭐다 해서 따로 공부하고 있는 것도 없고, 허벅지 근육도 아직 회복 중이라 운동도 빡세게 못한다.

그래서 진짜 소재가 없다 소재가…

근데 문득, 저녁 준비를 하면서 냉장고를 열었다가 쌓여있는 맥주를 보고서 내가 지난주 목, 금, 토요일 3일 연속으로 아주 맥주를 저녁마다 마셨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나는 맥주를 좋아하긴 하지만.. 최근에 이렇게 연속으로 마신 적은 없을 뿐더러, 그 빈도가 점점 줄고 있었다.

원인을 생각해보면, 그 동안은 맥주를 굳이 집에 쌓아두지 않았다. 있어봤자 한 두캔 정도?

그런데 지난 주 목요일에 장을 보러 갔다가 이마트에서 맥주가 8캔씩 묶어서 13,000원에 세일을 하길래… 주차권이나 받을 겸 16캔을 샀다.

그렇게 맥주를 김치냉장고에 쌓아두니… 뭔가 내 행동 패턴에 영향을 끼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소재도 없겠다. 오늘은 이걸 좀 파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런 개념이 있나?

있다. 그것도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연구가 되었고, 그 분야는 무려 마케팅·소비자 행동 분야다.

다시 말해, 내가 8캔을 묶어서 파는 아주 뻔한 마켓팅 수법에 당해서 3일간 음주를 한 아주 기가 막힌 쉬운 소비자 1번이었다는 말이다.

이름까지 깔끔하게 박혀있다. Stockpile Effect, 그러니까 비축 효과.

2002년에 INSEAD의 Pierre Chandon 교수랑 Cornell의 Brian Wansink 교수가 Journal of Marketing Research 에 발표한 논문이 거의 정설로 굴러다닌다. 24년 전에 이미 학술지에 박혀있는 거다. 즉 내가 마트한테 당한 게 새로운 함정도 아니라는 얘기.

핵심 발견은 두 줄로 요약된다.

집에 쟁여두는 양이 늘어날수록,

  1. 더 자주 소비하기 시작하고,
  2. 한 번 마실 때 더 많이 마신다.

내 케이스에 그대로 대입되어서 좀 웃겼다.

  • 평소에는 일주일에 0~1캔
  • 16캔 쟁여둔 후: 3일 연속 매일 두 캔 (incidence ↑)
  • 게다가 흐름 타면 세 캔으로 가는 날도 있다 (quantity ↑)

논문에 내 행동이 정확하게 적혀있는 셈이다. 24년 전 학자들이 이미 다 예측해놨다는 게… 좀 부끄럽다.

메커니즘 — 편리함과 “눈에 들어옴”

논문에서 이 효과의 원인을 두 갈래로 설명한다. 어려운 영어로 Convenience-Salience Framework 라고 부르는데, 풀어 쓰면 별 거 없다.

1. 편리함. Convenience

손 닿는 거리에 있으니까 마시는 비용이 0에 가깝다. “장 보러 갈까?” 같은 의사결정 마찰이 사라진다. 캔만 따면 끝.

2. 눈에 들어옴. Salience

이게 더 결정적인 거 같다. 냉장고 열 때마다 맥주가 보이니까, “어 이거 있었지” 하는 생각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내 케이스가 정확히 이렇다. 저녁 준비하려고 김치냉장고 여는 순간 — 그 안에 맥주 캔들이 줄지어 있는 게 시야에 들어오고, 그러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오늘 저녁에 한 캔?” 이라는 옵션이 떠오른다.

평소에 맥주 한 캔도 없을 땐 그런 생각 자체가 안 떠오른다. 떠오를 cue 가 없으니까.

즉 내 의지가 약한 게 아니라, 환경이 그 생각을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거다. (좋은 자기 위안이다.)

그리고 — 매일 cue 를 보면 craving 도 커진다

여기까지가 마케팅 쪽 정설인데, 한 발 더 나가면 중독 연구 쪽에서 더 강한 이름이 나온다. Cue-Induced Craving — 단서가 갈망을 유발한다는 거다.

이게 Charles Duhigg가 책 “Habit” 에서 정리한 그 유명한 Habit Loop 의 첫 번째 단계다.

Cue (단서)  →  Craving (갈망)  →  Response (행동)  →  Reward (보상)

내 지난 3일 저녁이 진짜 정확하게 이 4단계였다.

  1. Cue: 김치냉장고 열 때 보이는 맥주 캔
  2. Craving: “아 한 캔 마시면 좋겠다”
  3. Response: 캔 꺼냄
  4. Reward: 시원함 + 알딸딸함

근데 무서운 건 — 이 루프가 반복되면 cue 가 점점 더 빨리 craving 을 만든다는 거다. 첫날엔 “오 마실까?” 정도였는데, 사흘째쯤 되니까 저녁 준비를 시작할 때부터 머릿속에 “오늘은 한 캔” 이 미리 깔려있다. 냉장고를 열기 전에.

다행히 나는 중독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동일한 메커니즘이 강도만 약하게 작동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결국 마트가 이긴 게임이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정리하면, 결국 결론은 단순하다.

마트가 8캔 묶음을 13,000원에 파는 건 자선 사업이 아니다.

Chandon & Wansink 논문이 결론에서 한 줄로 짚어놨다.

쟁여두게 만들면, 결국 더 사가게 된다.

즉 마트는 16캔을 파는 그 순간 이미 다음 16캔의 매출도 한 발 더 가까워졌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주차권 받을 겸~” 하는 그 결정도 사실 마케팅의 설계 안에 들어있는 행동인 거다.

이걸 알게 된 다음에 좀 짜증나는 게, 마트의 마케팅 부서 어디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 논문을 진작에 읽었을 거란 사실이다. 8캔 묶음의 가격 설정도, 진열 위치도, 그게 그냥 우연이 아니라 24년 전에 학계가 검증해 준 메커니즘 위에 얹혀있다.

내가 진짜 기가 막힌 쉬운 소비자 1번이 맞다.

그래서 어쩌라고?

학자들의 처방은 의외로 단순하다.

“의지로 참는 것보다, 환경에서 cue 를 제거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다이어트, 금연, 절주 — 다 같은 원리라고 한다. 작심삼일이 무너지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환경이 그대로라서다.

내 맥주 케이스에 적용하면 답이 명확하다.

  • 마트에서 묶음 세일 보면, 그게 곧 다음 일주일치 음주 예약이라는 걸 의식한다.
  • 정말 마실 거면 — 그날 마실 양만 산다. 4캔이면 4캔.
  • 굳이 쟁여뒀으면 — 김치냉장고 깊숙이 안 보이는 곳에 둔다. cue 강도가 줄어든다.

근데 솔직히 — 다 알면서도 다음에 또 묶음 세일 보면 살 거다.

아니 어떻게 안사는데…ㅋㅋㅋㅋ

그게 인간이고, 그래서 24년 전 논문이 지금도 유효하다.


마치며

뭐, 없다.

어차피 또 사러간다.

그냥 아주 재미있는 행동경제학 개념이었고, 아주 완벽한 예시가 나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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